1622년 네덜란드가 세운 ‘오란여’ 성은 1640년 완공 뒤 ‘질란디아’로 개명했습니다. 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나뉘는데, 사각형 모양의 내성은 총 3층이며 지하에 있는 아래층은 창고로 씁니다. 지상에는 1, 2층이 있으며 위층 사각 모서리에는 보루가 있고 보루 사이에는 북문과 동문, 남문이 있습니다. 북문 문미 윗부분에는 ‘ T'CASTEEL ZEELDIA GEBOUWED ANNO 1634(질란디아 1634년 건설)’ 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아래층 사각 모서리에도 보루가 있습니다. 기단 각 변의 중앙마다 반원형 보루가 있는데, 반원 중앙에는 우물이 하나씩 있습니다.
북측에는 작은 문과 계단이 있어 지하실 탄약고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1, 2층에는 성가퀴가 있습니다. 볼록 튀어나온 보루 주변에는 전망대가 있고, 보루는 포탑 역할을 하며, 각각 대포 다섯 대가 있습니다. 성보 전체는 찹쌀풀과 모래, 굴 껍데기 가루로 만들었습니다. 현존하는 성벽 및 반원형 보루 잔해유적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안핑 고성의 잔해 유적입니다.
15세기 말엽 포르투갈인이 유럽에서 희망봉을 거쳐 동방으로 가는 직항로를 발견한 후부터, 서방 세력이 동방으로 서서히 이동해 오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먼저 도착한 것은 포르투갈인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카오를 점령한 후 중국 동남쪽 연해에 영사관을 설치했습니다. 그 뒤를 이어 스페인인이 들어왔고, 이에 질세라 일본인도 쫓아왔습니다. 원래 명나라와 통상하려고 했던 네덜란드인들은 경제적인 압박을 몇 배로 받았습니다.
17세기 말 무렵, 네덜란드 사람들은 두 차례 펑후(澎湖)를 점령하려고 했지만 명나라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1623년 9월, 코르넬리스 레이여르스 제독이 군사를 끌고 와서 안핑 항구 입구에 죽암을 세웠습니다. 이후에 명나라가 펑후를 공격하면서 군사적 위기에 처한 네덜란드는 수비를 철수하고 죽암을 철거했습니다. 하지만 1624년 7월, 네덜란드는 다시 타이완을 점령했습니다. 최초의 주 타이완 총독인 송크는 1곤신(鯤鯓) 죽암의 옛터에 성벽을 쌓았습니다. 벽돌과 돌이 부족해 모래와 흙으로 지은 다음 아오룬니야성이라고 불렀습니다. 1627년 질란디아로 개명한 후에는 성벽의 재료를 벽돌과 돌로 조금씩 변경했습니다. 전체 공정은 1633년 음력 1월 1일에 완료했습니다. 이게 바로 초창기 타이완성(왕성, 적감성, 안핑성)입니다. 네덜란드인이 만든 성인 데다가 그 당시 네덜란드인들은 붉은 털이라고 불렸기 때문에 이 높은 지대는 홍모성(紅毛城)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기에 개조한 후 안핑 고성이 되었으며 지금까지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명 영력 15년(1661), 타이완에 상륙한 정성공이 네덜란드를 쫓아내고 질란디아로 이전하면서 이 성은 왕성이라고 불렸습니다. 청 강희 22년(1683), 타이완이 청나라에 편입되면서 왕성은 옛 지위를 잃고 이곳에 국장국(軍裝局)이 설치되었습니다. 청 통치 10년(1871)에 무기고가 폭발하면서 성벽이 무너졌습니다. 청 통치 13년(1874) 심보정(沈葆楨)은 잔해 유적으로 변한 타이완성이 군사적 가치를 잃었다며 타이완성의 벽돌과 돌을 대량으로 철거해 2곤신 포대(현 억재금성[億載金城]) 재료로 사용했습니다. 지금까지 타이완성은 성벽이 무너진 채로 남아 있습니다. 일본 메이지 30년(1897), 안핑(安平) 세관 숙소를 짓기 위해 잔해 유적 위에 높은 지대를 만들고 그 위에 서양식 건물을 지은 다음, 안핑 고성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이때 타이완성은 원래 모습을 잃었으며 무너진 성벽만이 그 시절 역사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스톈푸[施添福], 1999:48p) 하지만 일본 쇼와 11년(1936) 쿠리야마 슌이치가 제작한 복원도에 따르면 당시 각성(외성)에는 내성과 외성 성벽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외성에는 잔해 유적 다섯 개가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구바오가(古堡街)와 궈성로(國勝路), 안핑로(安平路) 85항 및 안베이로(安北路)로 이루어진 ‘L’형 가곽에는 타이완성 잔해 유적이 여섯 개로 추정됩니다.
그중 하나는 궈성로71, 73, 75, 77, 79호 뒤 민가 사이에 숨어 있습니다. 궈성로와 평행하는 해당 유적은 각성(외성) 북측성벽 잔해 유적으로 추정됩니다. 높이 약 2m에 길이 38.7m, 두께 2m로, 벽에는 약 2m, 1.5m 높이의 문이 있습니다(구 쩡궈언[曾國恩] 건축가 사무소, 1993:100p). 두 번째와 세 번째는 궈성로67호 및 그것과 연결된 관 가게 사이 장벽에 숨겨 있습니다. 두 개의 총 길이는 약 1.5m이고, 높이는 약 2.7m입니다. 전자의 두께는 0.5m이고 각각의 길이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네 번째는 서룡전(西龍殿) 뒤에 위치하며 각성(외성)의 남서쪽 보루 잔해 유적으로 추정됩니다. 길이는 15.15m, 높이는 5.4m이며, 측면에서 보면 아래는 좁고 위는 넓은 사다리 모양입니다. 두께는 알 수 없습니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유적을 살펴보면 전자는 안룡단(安龍壇) 북동쪽 담과 궈성로 67호를 경계로 하며 길이는 약 7.63m에, 높이는 1.81m이고 두께는 알 수 없습니다. 벽에는 조롱박 모양의 문이 있습니다. 조립용 벽돌의 길이, 시멘트 모르타르를 봤을 때 타이완성 잔해 유적이 아닌 것으로 추정됩니다. 후자는 궈성로 75호 앞에 있는 바깥 담입니다. 길이는 약 3.18m, 높이는 2m, 두께는 0.32m입니다. 대부분 화단으로 뒤덮여서 완전한 모양은 알 수 없습니다. 위에 기술했듯이 성의 잔해 유적은 두 주택 사이에 끼어 있고 주택 사이의 틈이 좁은 탓에 길이와 두께를 측량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부분은 이후에 추가 조사가 필요합니다.
2001년 9월, 정부에서는 ‘안핑 항구 국가 역사 풍경 구역’ 계획을 실시했습니다. 비파괴 지면 통과 레이더 검사를 통해 내성의 주춧돌 유적 여러 곳을 알게 됐고, 건축과 토목, 고고학의 과학 기술 결합을 통해 역사 고고학 분야가 학술적 의미에서 큰 수확을 거두게 됐습니다. 2004년 9월, 타이난 시정부는 관련 외성 유적을 ‘시 지정 유적’ 목록에 포함한 후 ‘질란디아 성벽 및 성내 건축 유적’이라고 명명함으로써 유적 보호를 강화했습니다. 관 근처의 전망대는 근대에 만들었습니다. 전망대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면 해안이 어렴풋이 보입니다. 루얼먼에 상륙한 명나라 군대와 북선미 네덜란드 해보가 교전을 벌인 곳입니다. 정씨 왕조의 공훈과 업적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안핑 소포대
타이완성 잔해 유적 서쪽에 위치합니다. 포대의 성 보호 돌 제방은 좁고 긴 형태로 남북으로 뻗어 있습니다. 안평 소포대에는 포대 본체 및 북쪽의 성 보호 돌 제방이 포함됩니다. 포대 본체는 저수지 공원 옆에 위치합니다. 화강암과 자갈을 쌓았으며 남, 북, 서쪽에 벽돌로 만든 성가퀴 여섯 개가 있고, 그 아래에는 지하 탄약고 설비가 있습니다. 포대 바닥은 붉은 벽돌로 되어 있고 포대 위에는 원래 영국식 B.P. 9파운드 포환 전장 철포가 있었습니다. 지금 있는 대포는 원래 있던 물건이 아닙니다. 북쪽의 돌 제방은 산호석을 쌓아 회삼물을 매립해 만들었습니다. 이곳에는 총안이 있는데, 총안에는 문과 물막이를 설치했습니다. 돌 제방의 앞부분은 민가와 왕성 서쪽 지역 사회 이벤트 센터 공터에 깊숙이 위치하며 민가와 가깝습니다. 뒷부분은 옛 포대를 중심으로 한 돌 제방입니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광장과 높이가 낮은 민가, 유치원, 성당과 인접해 있으며 서쪽에는 양식장이 있습니다. 이로써 선형 방어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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