在地藝文

KSK Church(看西街教會)

A church with a white dome that is a copy of St. Paul’s Cathedral in London is hidden down an alley on Kuohua Street. This place is of great significance in terms of the history of the meeting of Tainan and Westerners. This was where Dr. James Laidlaw Maxwell(馬雅各醫師) practiced medicine and spread Christianity after arriving in Tainan in 1865. At the time, this was an important street in the Five Channels area. As the street runs west, it was called “Kanshi Street.” The doctor-missionary was forced to leave not long after arriving after encountering resistance from local traditionalists.

룽톈 차차 문화자산교육단지(隆田chacha文化資產教育園區)

과학기술, 예술, 자연으로 재탄생한 룽톈 차차 문화자산교육단지

철로, 계측실 구조, 역사 건축물 타이옌 룽톈 운송역 및 창고군 등 “여객, 제염업, 제당업, 저수지 공사용 4대 철로가 공존했던 시기의” 산업 문화재들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또한, 타이완 최대 규모 수리공정 “가남대수(嘉南大圳)”을 테마로 한 몰입형 극장, 인터랙티브 장치, 공공 설치예술 및 전문적인 타이난 고고학 센터를 갖추고 첨단 기술로 백 년 전의 지혜가 결집된 대형 공사들을 새롭게 설명합니다. 교육단지의 이름 “차차(Chacha)”에는 시민들이 다시 찾아 주기를 바라는(Come Here Again)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북 창고, 남 창고, 고고학존의 3대 전시구역으로 구성

 

북 창고 전시구역

담아 만든 관톈 관광 센터(官田遊客中心)

시라야족 요소를 더한 건축 설계
광활한 면적에 끝없는 농촌으로 둘러싸인 관톈 관광 센터는 근처에 국도 3호 우산터우 IC(烏山頭交流道)가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시선을 사로잡는 건물 외관은 시라야족의 문화를 결합한 것으로 시라야족 마을 건축을 콘셉으로 설계했다. 타이난(台南)의 '햇빛'과 자난 평원(嘉南平原)의 '바람', 시라야족 신앙 아리쭈(阿立祖)의 '물'을 3대 원소로 설계했으며, 시라야족 전통 의상의 색깔을 건물의 메인 톤으로 정하고 흰색 바탕에 파란색과 노란색으로 포인트를 줬다. 시라야족 마을의 전통을 따라 물을 마주 보는 방식으로 설계했으며, 멀리서 바라봤을 때 산과 논으로 둘러싸인 것처럼 보여 고요한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사진 명소 & 다양한 실내 시설

타이난 시립 도서관 총관(臺南市立圖書館總館)

책 읽는 사람과 관광객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곳
도서관에 대한 편견을 깨자! 멀리서 보면 한눈에 들어오는 금색 창살이 섬세한 미적 감각을 드러낸다. 타이완과 네덜란드 건축가가 공동으로 설계한 창살 무늬를 자세히 보면 타이난 옛 건물 특유의 창문 장식 모양이 어렴풋이 보인다. 최첨단 건물에 전통적인 특색을 더해 백 년 도서관의 계승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며 밤이 되면 건물의 라이트 아트가 융캉구(永康區)의 밤하늘을 눈부시게 밝힌다. 독특한 외형 덕분에 새로운 IG 인증샷 명소뿐만 아니라 수많은 포토그래퍼가 앞다투어 찍으려고 하는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1층 안내 데스크 옆에는 타이난 시립 도서관 총관의 독특한 '24시간 스마트 도서관'이 있다. 안에는 2400권을 소장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며, 간단한 절차로 책을 대여하고 반납할 수 있다. 24시간 서비스이기 때문에 아무때나 빌리고 반납할 수 있다. 유리를 통해 책이 벨트에서 운송되어 책 상자에 들어오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독특한 장식 스타일

신잉 철도 문화 단지(新營鐵道文化園區)

新營糖廠曾經風光一時,製糖業鼎盛時在柳營往新營急水溪橋前的省道上常看見五分車滿載著甘蔗沿著鐵路緩緩的駛入糖廠,但在糖業式微後再也見不到此種光景,五分車不再啟動,糖鐵也漸漸消失在大家的記當中,但唯一不變的還有台糖廠區中一直都有的冰店老味道,至今仍是許多人約會的去處,也是許多人回憶單純的老味道之處。

 

停駛多年的五分車也在觀光風氣逐漸鼎盛之下復駛,載的不是甘蔗,而是一車一車的遊客,從新營糖廠中興車站出發,沿著急水溪畔,一路往柳營八翁里緩緩前進,沿途會見到廣闊的田野景致,以及越過潺潺溪水,車上活潑有趣的導覽員會將高聳的電塔比喻為新營的巴黎鐵塔,妙語如珠常逗得遊客歡笑不已,最後抵達八老爺車站,可在此品嘗牛奶鍋,體驗餵牛擠牛奶等活動,相當適合親子一日小旅行,行程相當豐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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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잉 철도 문화 단지(新營鐵道文化園區)에 위치한 신잉 설탕 공장(新營糖廠)은 타이완 슈가 그룹의 3대 공장 중 하나입니다. 고층 구조 조직으로 인해 독특한 사무실과 숙소를 자랑합니다. 철도 궤도가 많고 차량 배차가 원활하기 때문에 타이완 슈가 그룹의 우펀짜이처(五分仔車) 터미널이 번성하던 당시 주요 운수 거점이었습니다.

 

치구 여행객센터(七股遊客中心)

치구 여행안내센터는 교통부 윈난/ 자이/ 타이난 해변 국립 풍경 관리처가 신축하여, 2020년 5월 5일 일반에게 정식으로 개방한 총 면적 약 3.8헥타르의 시설이다. 치구 소금산과 타이완 소금 박물관을 연계하여 치구 소금 문화원구의 완벽한 벨트형 여행 코스를 조성하였습니다.

전체 건물의 설계 컨셉은 『제방』입니다.  환경에 미치는 시각적 영향을 줄이기 위해, 지역의 일반적인 요소인 바다 제방, 하천 제방, 소금 제방, 토질 등의 이미지를 응용하여, 건축 설계 기술을 활용하였습니다. 제방을 공간으로 전환시킴에 따라, 마치 빗물에 무너져 깍아진 듯한 절벽으로 형성된 소금 덩어리가 때로는 완만한 비탈 같고, 때로는 골짜기처럼 보입니다. 건축 구조를 이용해 공간 속에 소금산 풍경을 재현하여, 지역적 특색을 증가시켰습니다. 이 독특한 건축물은 웨딩 촬영이나 인스타 사진을 위한 핫포토 플레이스가 되었습니다.

반궁 돌패방(泮宮石坊)

‘반궁 돌패방’ 은 원래 공자묘 제일 바깥쪽에 있는 출입구였습니다. 건륭제 시절 지부 장원추는 공자묘를 복원하면서 해당 출입구를 재정비하고자 석공에게 아름다운 돌패방을 주문했고, 그때 이 아름다운 돌패방은 타이난에 세워졌습니다. 타이완에서 이런 돌패방을 만나볼 수 있는 공자묘는 타이난 공자묘밖에 없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난먼로(南門路) 개통을 위해 돌패방과 공자묘는 분리됐습니다. 돌패방의 원래 기능은 사람들 기억 속에서 점점 희미해져 갔고 이제는 돌패방이 공자묘의 부속 건물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베이먼 브롬 제련탑(北門溴提塔)

브롬은 중요한 화학 공업 원료입니다. 난연제와 소화약제, 냉매, 의약, 농약,  화학비료 등 다양한 용도에 쓰입니다. 일제 강점기 말, 브롬은 전쟁적 필요에 의해 염전의 고농도 해수와 간수에서 추출됐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브롬 제조 공장 등은 염전 근처에 위치하죠. 일본 소다, 일본 염업, 타이완 척식은 공동 출자를 통해, 1939년 타이난시 안핑(安平)에 안핑 공장을 설립하고 베이먼(北門) 등 지역에 지사 공장을 설립했습니다. 베이먼 브롬 벽돌탑은 그중 하나입니다. 

베이먼 구온인(진계기 공원묘지)(北門九氳氤(陳姓桂記墓園))

베이먼구(北門區) 타이완 17번 국도(省道)에서 약 143km 떨어진 곳 근처에 위치하는 작은 언덕입니다. 정성공(鄭成功)의 고모 정세(鄭細)가 묻힌 곳으로 현지 주민들은 이곳을 ‘선조 할머니 무덤’이라고 부릅니다. 청 정부는 타이완에서 명나라 정씨 왕조의 씨를 말리기 위해 도처에 있는 정씨 왕조 후손의 무덤을 파헤쳤고, 정씨 왕조 후예는 이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베이먼 언덕 근처에 똑같이 생긴 무덤 9개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지리적으로 태강 내해 근처에 있어 해면 수증기가 언덕 전체를 덮는 탓에 ‘구온인(九氳氤)’이라고 불렸습니다. 

구 타이완 부성 동문 구간 성벽 잔해 유적(原臺灣府城東門段城垣殘蹟)

광화가(光華街) 대동, 소동문 사이에 위치한 잔해 벽입니다. 그 구조와 외관을 봤을 때 현재 성대 광복(成大光復) 캠퍼스 내 소동문 일대 잔해 유적과 청 건륭 53년(1788)에 함께 지어진 듯합니다. 청 시기에 타이완에서 주일귀(朱一貴) 사건이 일어난 후 용정 11년(1733)부터 황제의 윤허를 받아 목책 죽성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건륭 53년(1788), 임상문(林爽文) 사건 평정 후 부성의 수비 강화를 위해 목책 죽성을 토성으로 변경하기 시작했습니다. 담장이 견고해지고 규모도 장엄해졌으며 도광 12년(1833) 장병(張丙)의 봉기 직전까지 이 규모를 유지하다가 그 후 외성을 확장하고 일본 메이지 44년(1911) 타이난 시 구역 개정 실행 후 서서히 철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