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베이팡 문화단지(鎮北坊文化園區)
전베이팡 문화단지의 범위는 대부분 현 타이난시 베이취(北區) 안에 위치해 있습니다. 과거 전베이팡은 청나라 시기 행정 관공서 및 군사 요충지였습니다. 이에 상응하는 많은 지명이 생겨났는데, 예를 들어 다충가(大銃街, 현 쯔창가自強街), 쫑예가(總爺街, 지금의 충안가崇安街) 등 비교적 군사적 상징의 지명들이 있습니다.
전베이팡 문화단지의 범위는 대부분 현 타이난시 베이취(北區) 안에 위치해 있습니다. 과거 전베이팡은 청나라 시기 행정 관공서 및 군사 요충지였습니다. 이에 상응하는 많은 지명이 생겨났는데, 예를 들어 다충가(大銃街, 현 쯔창가自強街), 쫑예가(總爺街, 지금의 충안가崇安街) 등 비교적 군사적 상징의 지명들이 있습니다.
타이난 공원을 걷다보면 역사가 오래된 돌 패방(牌坊)을 볼 수 있는데 위쪽에는 ‘중다오충원(重道崇文)’이라 쓰여있습니다. 이는 1815년에 지은 것으로, 이로써 부성의 린차오잉(林朝英)이라는 인물이 선행을 베풀어 대만 현학 문묘(台灣縣學文廟)를 지은 것을 표창하고자 하였습니다.
돌 패방은 원래 룽왕먀오(龍王廟) 사당 앞, 즉 난먼로(南門路) 구 타이난 경찰서 일대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일본 통치 시기인 1934년 현재의 난먼로를 개발하면서 룽왕먀오는 허물게 되었고, 돌 패방은 타이난 공원 옌탄(燕潭) 옆으로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타이난 공원에서 매우 중요한 문물입니다.
카이위안사(개원사)는 타이난 4대 옛 사찰 중 하나로, 북원 별관(北園別館)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습니다. 1680년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카이위안사의 전신은 연평왕 정징(延平王鄭經)이 모친인 동태비(董太妃)를 모시기 위해 지은 별관이었습니다. 사찰 내 정원 조경, 누정과 궁방 모두 매우 정교하고 우아하며, 굽이진 작은 다리와 망루 등 건축물이 더해져 전국 정원 중의 으뜸이라는 명예를 얻었습니다. 현재 사찰 내에는 명정(明鄭) 시기의 문물을 많이 보존하고 있어 옛 대만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 거점이 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불학원(佛學院), 유치원, 자애 병원(慈愛醫院)을 설립해 현대 사람들의 생활에 가까이 다가가고 일상에 녹아든 아름다운 고적으로 자리잡았습니다.
1662년 명나라 시기 건립된 카이지 톈허우궁 사당은 대만 최초로 민간이 세운 마쭈(媽祖) 사당입니다. 그 규모가 다톈허우궁(大天后宮)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타이난 사람들은 작은 마쭈 사당이라고 부릅니다. 규모가 크지 않고 작은 사당이지만 신의 거대한 위엄은 여전히 느껴집니다.
최근에는 카이지 톈허우궁 맞은편의 쥬라이파 빵집(舊來發餅舖)이 인기를 얻어 근처에 여행객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신메이가(新美街)의 아이스크림 가판대도 톈허우궁 앞에 노점을 차려 새로운 사당 디저트 문화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싼산궈왕(삼산국왕)은 광웨(廣粵) 지역의 민간 신앙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742년 건립된 타이난 싼산궈왕 사당은 대만에서 유일한 정통 광동식 건축물로, 삼산의 신인 건산국왕(巾山國王), 명산국왕(明山國王), 독산국왕(獨山國王)을 모시고 있습니다. 삼산국왕 외에도 한문공(韓文公)과 천상성모(天上聖母)도 모시고 있습니다. 입구에 오면 일반적인 사당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다른 사당처럼 화려하지 않으며 벽면의 채색화에는 튀지 않고 소박하며 우아한 색깔을 사용했습니다. 배전(拜殿)의 용과 호랑이 부조는 매우 정교하여 그냥 지나쳐선 안될 관람 포인트입니다. 사당 내에는 역사가 오래된 편액들이 많이 있습니다. 정전에는 건륭황제(乾隆皇帝)가 하사한 ‘포충(褒忠)’이 있고, 한문공 사당 내에는 광서황제(光緒皇帝)가 하사한 편액이 있습니다. 정전 뒤쪽에는 4개의 곁채가 있는데 그중 한 곳에서는 삼산국왕 부인을 모시고 있습니다. 사당 전체에서 차오산(潮汕)의 짙은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민남식과는 다른 사당 건축물을 보고싶다면 삼산국왕 사당이야말로 놓쳐서는 안될 역사 고적입니다.
쯔창가(自強街) 골목에 ‘우구이징’이라 불리는 고적이 하나 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이 우물은 수원이 왕성하여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1653년 굴착 후 지금까지도 물이 있는 상태이며, 당시에는 왕래하는 선박들과 현지인들의 음용수로 이용되었다고 합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이곳에 온 동인도 회사의 네덜란드인이 흑인 노예를 데리고 와 우물을 팠다고 합니다. 당시 대만 사람들은 피부가 검은 흑인을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우구이(烏鬼, 검은 귀신)이라 불렀다고 하며 이 우물의 명칭도 이로부터 유래되었습니다. 후에 일본 통치 시기에 이르러 점차 우물물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불의의 추락사고도 자주 발생하자 일본인들이 우물 입구를 막고 덮어버렸습니다. 그 후 1955년에 이르러 고고(考古) 작업을 통해 복구되었습니다.
타이난 시내의 우구이징, 융캉(永康)의 우구이교(烏鬼橋), 신화(新化)의 우구이춰(烏鬼厝) 모두 흑인 노예를 수감하고 매장했던 장소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록 타이난에는 당시 흑인 노예에 관해 기재된 사실이 많지 않지만, 이로부터 당시 흑인 노예의 활동 지역과 부성이 국제 해상 무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