宗教廟宇

더화탕은 대략 1838년에 설립되었고, 일본 통치 시기 도로 확장 및 2차 세계대전 공습을 겪으면서 지금은 옛날과는 다른 규모를 갖게 되었습니다. 더화탕은 재교 용화파(齋教龍華派) 사찰에 속하며, 재가 거사(在家居士, 출가하지 않고 속세에서 수행하는 불교 신자)의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이에 공간이 전통 민가와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내부 공간은 불교 사찰에 있는 채색화와 장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정전에는 관음보살을 모시는 것 외에도 비교적 특수한 신상(神像)이 있는데, 바로 용화파의 조사 뤄쭈(羅祖)의 신상입니다. 또한 신상 앞에는 3개의 의자를 놓았는데, 이를 삼공의(三公椅)라 부르며 용화파 뤄쭈, 인푸넝(殷普能), 야오푸(姚普) 세명의 조사를 상징합니다. 또한 사당 안에서 대가 판리수이(潘麗水)의 벽화 작품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당의 오래된 편액으로는 청나라 동치(同治) 5년(1866년) ‘안찰사 순찰 대만 병비도(按察使銜分巡臺灣兵備道)’ 딩웨젠(丁曰健)이 바친 ‘혜보군생(惠普群生)’과 도광(道光) 7년(1827년)의 ‘관자재(觀自在)’이 비교적 유명합니다.

수이셴궁 시장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많은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배가 고파질 것입니다. 시장 안에 수선존왕(水仙尊王)을 모시는 수이셴궁 사당이 있어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수이셴궁은 1703년 건립되었고, 옛날에 이 곳은 우탸오항(五條港) 중 하나인 난스항(南勢港)이었으며 상인들이 운집하는 곳이었습니다. 사당 역시 현지 상인들이 자금을 모아 지은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수이셴궁은 당시 7사찰 8사당 중 하나였던 웅대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으며 그 대신 번화한 시장으로 변모했습니다. 수이셴궁을 참관하실 때는 시장에서 보물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이곳은 타이난의 주방이라 불릴 만큼 온갖 식자재들이 없는 것이 없습니다. 또한 역사가 오래된 먹거리 가게들도 숨겨져 있어서, 역사적 정신을 탐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거리를 드나들며 허기진 배를 맛있게 채울 수도 있습니다.

대만부 청황먀오(성황묘)는 대만부 성황위령공을 모신 도교 사당으로 중시구(中西區) 칭녠로(青年路)에 위치해있으며 국가 지정 고적으로 대만의 유명한 성황묘이기도 합니다. 1669년 둥안팡(東安坊)에 설립되어 당시에는 승천부 청황먀오(承天府城隍廟)라 불렸습니다. 이 사당은 대만에서 가장 오래된 정부가 지은 성황묘이며 정전(正殿)에는 대형 주판이 걸려있습니다. 이는 1937년 신도인 천장산 씨가 헌납한 것으로 주판 틀 상단에는 ‘타이난부 청황먀오(臺南府城隍廟)’ 여섯글자, 하단에는 ‘정축년 천장산 헌납(丁丑年陳江山奉獻)’, 좌우로는 ‘선악을 행할 권리는 사람이 스스로 결정하지만, 옳고 그름은 정해져 있어 변명의 여지가 없다(善惡權由人自作,是非算定法難容)’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성황신이 주판으로 세상 사람들의 잘잘못을 계산하며 악을 경계하고 선을 알린다는 의미를 상징합니다. 사당 내에는 부성 3대 명편 중 하나인 ‘네가 왔구나(爾來了)’ 현판이 있는데 세상 사람들에게 경계할 것을 권고하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타이난 부성은 지형이 봉황과 닮았다 하여 봉황성(鳳凰城)이라 불렸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보제전은 풍수적으로 팔괘망(八卦網)의 중심점에 위치해 있습니다. 타이난 왕성(王城)의 봉황이 날아가지 못하도록 보제전과 그 주변에 사방으로 통하는 팔괘망과 같은 도로를 지으면서 팔괘망으로 부성을 흥성하게 하는 봉황을 붙잡아 두었다고 합니다. 최근 보제전의 명성이 자자해 진 것은 2014년 춘절 기간 처음으로 개최된 창의 채색등으로 인한 것입니다. 수많은 등불이 드넓은 사당 앞 광장에 가지런히 걸리고 주변 궈화가(國華街)까지 뻗어 나가, 지나가는 여행객들과 시민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춘절 기간에는 등불이 어둠 속에 따뜻하게 빛을 내면서 명절에 한자리에 모이는 따뜻함을 느끼게 해주어 호평을 얻습니다.

궈화가(國華街) 골목 사이에는 영국 세인트 폴 대성당을 본뜬 흰색 원형돔 교회가 숨겨져 있습니다.  타이난과 서양간의 교류 역사에도 중대한 의의가 있는 이곳은 바로 마야거(James Laidlaw Maxwell) 의사가 1865년 타이난에 와 의료 선교를 한 장소입니다. 당시 이 곳은 우탸오항(五條港)의 중요 거리였으며 거리가 서쪽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에 칸시가(看西街)라 이름지었습니다. 마야거 의사는 이 곳에서 의료 선교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아 현지 수구파의 반대로 어쩔 수 없이 이곳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후 1868년 타이난으로 돌아와 현재의 신러우 병원(新樓醫院) 위치에서 의료 선교를 계속했습니다.
1951년 칸시가 교회가 완공된 뒤, 이러한 선교 개척사를 기념하기 위해 ‘칸시가 교회(看西街教會)’라 명명했습니다. 수이셴궁 시장(水仙宮市場)을 지날 때 골목 사이에 숨겨진 이 아름다운 교회를 찾아보는 것도 좋습니다.

「鎮安堂」、別名「飛虎将軍廟」の廟内に祀られている神は神界の神ではなく、第二次世界大戦期の日本軍人「杉浦茂峰」です。杉浦茂峰は1944 年に台湾に配属され、日本海軍の兵曹長を務めていました。同年 10 月 12 日午前に空中戦が発生し、彼は戦闘機で米軍を迎撃しました。台南の海尾寮荘上空で対戦となり、戦闘機の尾翼が米軍の攻撃を受け、戦闘機が墜落する中、彼は村に墜落して住民に被害が及ばないようにとすぐに避難せず、懸命に戦闘機を村の周囲の養殖池、農地まで操縦し、戦闘機が村から離れてやっと落下傘で脱出しました。しかし不幸にも、落下傘が米軍に撃ち落され、高空から墜落して命を落とし、戦死後に少尉を追贈されました。

 

戦後、人々は次第にこの事件を忘れ、そしてある日、現地の住民が遠くに白い帽子と白い服を着た亡霊が養殖場の辺りで何かを探しているかのように歩き回る姿を目撃し、人々が近づいた時には姿を消していました。そこで住民たちが海尾朝皇宮の保生大帝に伺いを立てたところ、保生大帝はこの亡霊は戦争で亡くなった杉浦という者で、この地で安らかに暮らすことを願っていると答えました。

 

台南市香光聖堂は一貫道に属し、弥勒仏、燃燈仏、釈迦仏を祀っています。総面積は約1350坪です。堂内の「無尽蔵文物館」には国内外の貴重な古文物が収蔵されています。無極清虚宮、三聖殿などの華麗で優雅な建築物に廟の正面にある主牌楼(大門)や4本の樹齢100年以上のアカギが聖堂に荘厳な雰囲気を醸し出しています。

潁川家廟は清嘉慶年間に建てられ、1956年に全面改修が完了しました。潁川家廟はレンガ造りの建物で、陳家の最初の1祖先が居を定めた場所です。閩南式のロの字型建築で、2進3開間の配置となっており、,穿斗式の屋根組みとなっています。木造構造で、屋根は赤い仰合瓦、稜線は燕尾のように跳ね上がり、建物本体には草花、龍、雲などを象った装飾が施されています。

仁寿宮祭祀大道公、太子爺は明鄭時代に作られたと伝えられています。主祭神として祀られている保生大帝は、300年以上前、鄭成功の部下であった呉鳩山が順調な航海を祈願して福建省同安県から携えてきた金色の保生大帝像が奉納されたものです。もともとは吳の住まいにありましたが、保生大帝が非常に霊験あらたかで、地元の人々がその奇跡的な庇護に感謝を示すために廟が建立され、増築を繰り返し、現在の規模となりました。

1624年、オランダ人によって安平に熱蘭遮城(ゼーランディア城)が建設されましたが、その地が後背地であったため、台江対岸の赤嵌(当時の台南平埔族赤崁社の居住地)に政治と経済の中心として新たに普羅民遮城(プロヴィンティア城)が建設されました。赤嵌街と普羅民遮街の発展にともない、商業都市としての繁栄の歴史の幕開けとなりまし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