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古蹟

장영 여자 중고등학교 장영 빌딩(長榮女中長榮大樓)

장영 여자 중고등학교는 타이완 최초의 여성 교육 기관으로 1887년에 설립됐습니다. 당시에는 신루(新樓) 여학교라고 불렸으며 유일한 입학 조건은 전족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입학생이 19명밖에 없을 정도로 당시 여성의 지위는 매우 낮았습니다.
 
 학교 본관과 강당은 1923년과 1933년에 지어졌고 여성 교육의 중대한 사명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교회 인사들이 교장을 맡았지만 2차 세계대전 발발 후 일본인이 교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분위기는 사라지지 않았고, 장영 빌딩도 여전히 장영 여자 중고등학교의 정신적인 상징입니다. 

승리 초등학교 강당(구 승리 국민학교 강당)(勝利國小禮堂(原勝利國民學校禮堂))

승리 국민학교 강당은 현재 승리 초등학교 안에 위치합니다. 원래는 타이난시 죽위(竹圍) 국민학교로, 1939년에 세워진 타이완 어린아이들의 초등학교였습니다. 이곳은 2차 세계 대전 직후에도 타이난시 둥구(東區)에 하나밖에 없는 초등학교였습니다. 당시 항일 전쟁 승리를 기념하고자 학교명을 ‘승리 국민학교’로 바꾸었고, 1953년 국군 공병 지원 부대가 강당 설립을 도왔습니다. 작은 목재와 큰 스팬의 이중 경사식 비스듬한 지붕은 이 건물의 특징이 되었습니다. 

잉촨 가묘(潁川家廟)

잉촨 가묘는 청 가경 년간  1956년에 준공했습니다. 잉촨 가묘는 벽돌 건물입니다. 진씨 가문 1대 조상이 발을 디딘 곳으로 민난식 ㅁ자형 건물입니다. 2번 들어가는 3중 구조에 트러스는 천두식(穿斗式), 구조는 나무 구조에 속합니다. 지붕은 붉은 앙합와(仰合瓦)로 덮었으며 용마루는 연미척(燕尾脊), 실내는 화초와 용문,  구름 모양 그림 등으로 장식했습니다. 

인수궁(仁壽宮)

인수궁은 대도공(大道公)과 나타의 제사를 지내는 곳입니다. 정씨 왕국 시기에 지어졌으며 주사(主祀)인 보생대제(保生大帝)는 300년 전부터 섬겼다고 하는데, 정성공(鄭成功)의 부하 무관 오구산(吳鳩山)이 바닷길이 순조롭기를 기도하면서 푸젠성(福建省) 퉁안현(同安縣)부터 보생대제 금불상을 몸에 지니고 다니며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원래 지방 인사들은 오씨 집안을 섬겼지만 보생대제가 영험하자, 신의 보호에 감사하다는 뜻으로 사당을 지었고, 여러 차례 증축을 거친 끝에 인수궁은 현재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정성공 묘지 기념비(鄭成功墓址紀念碑)

정성공(鄭成功), 정경(鄭經) 부자 무덤은 고공건(高拱乾 )의 <타이완 부지(臺灣府志)>에 따르면, [타이완현 우딩리(武定里) 저우짜이웨이(洲仔尾)], 다시 말해 융캉구(永康區) 옌저우리(鹽洲里)에 안장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청 강희38년 (1699) 황제의 명을 따라 푸젠(建南) 난안(南安)으로 이전했고, 전 타이난 현정부는 그의 넋을 기리고자 1980년  ‘정성공 기념비’를 이곳에 세웠습니다. 

택현당(擇賢堂)

엽석도(葉石濤) 기념관 근처에 있는 골목에 위치하고, 골목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세상과 격리된 것처럼 조용합니다. 택현당 건물은 오래된 색과 향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얀 벽에는 나무 원색의 문과 창이 박혀 있고, 녹색 환기 무늬 타일로 장식했습니다. 예배당의 진열 방식도 전통적인 모습을 여전히 지니고 있습니다. 1879년부터 지금까지 몇 차례 정비를 했지만 원래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재교 선천파의 절이었지만 이제 불문 법사가 이곳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보은당(報恩堂)

보은당은 함풍 11년(1861년) 부치(府治) 동안방(東安坊) 우영포(右營埔)에 세워졌으며 선천파제교(先天派齋教)의 조사당이었습니다. 처음 세울 당시에는 누추한 초가집이었지만 동치 5년 (1866년)에 재건했습니다. 광서 12년(1888년) 신도들은 영원한 계획을 위해 재료와 사람을 모아 보은당을 기와 구조의 절로 변경했습니다. 메이지 29년(1896년) 일본인은 보은당을 타이난 병원으로 개조했고, 책임자인 정량모(鄭良謨)는 보상금과 신도들의 헌금으로 보은당을 현재 위치로 옮겼습니다.   타이난 보은당은 ‘타이난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통 목조 건축물’이라고 불립니다.  

마더우 임씨 가문 저택(麻豆林家四房厝)

‘마더우 임씨 가문’은 경제와 정치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두면서 그 명성이  ‘타이중(臺中) 우펑(霧峰) 임씨 가문’과 ‘타이베이(臺北) 반차오(板橋) 임씨 가문’과 어깨를 나란히 했습니다. 이 세 가문은 ‘타이완 3대 임씨’라고 불립니다. 분가 및 계승과 도시 발전에 따른 토지 가격 상승으로 청나라 시기에 세워진 아름다운 저택 일곱 개는 권력자의 생각 차이로 철거의 운명을 맞이합니다. ‘저택’은 이로 인해 비교적 빨리 철거됩니다. 1978년 5월, 고택에 대한 권력자들의 생각 차이로 중축선 왼쪽 절반이 일부 철거됐습니다. 

적감 문화 단지(赤嵌文化園區)

1624년, 안핑에 질란디아를 세운 네덜란드인은 중심부와의 관계를 고려해 태강 맞은편에 있는 적감에(당시 타이난은 핑푸족 적감사의 소재지라고 불렸습니다) 정치와 경제 중심인 프로빈티아(오늘날 적감루)를 세웠습니다. 게다가 적감가와 프로빈티아가를 발전시키면서 부성에 상업 발전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진영화 무덤(진영화 총제 부부 고묘)(陳永華墓(陳永華總制夫婦古墓))

<녹정기>를 읽어본 사람이면 강한 의협심에 무공까지 겸비한 천지회의 총탁주 진근남이 낯설지 않을 텐데요. 소설 속 허구 인물인 진근남의 실제 모델이 바로 진영화(陳永華)입니다. 그는 타이완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정경(鄭經)을 보좌해 타이완을 통치했습니다. 그는 마치 촉한의 제갈량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1680년 서거 후 톈싱주(天興州) 츠산보(赤山堡) 대담산(大潭山)(현재 류잉구[柳營區] 궈이리[果毅里])에 부인과 함께 합장됐다가, 청나라에 복속 후 푸젠성 퉁안(福建同安)에 안치됐습니다. 이곳은 무덤 유적이 되는 과정에서 수십 년간 방치된 상태를 겪었고, 지금까지 현지인들이 신이 나서 얘기할 정도로 다양한 민감 기담이 생겨났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진영화가 이곳에서 자신의 임무를 다하며 병사를 훈련한다고 하더군요.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진영화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많았고 마침내 2000년 타이난현 문화처와 임씨 상인이 무덤 복구 및 주변 조경화를 진행하게 되면서, 무덤은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