宗教廟宇

명성이 높은 관제전은 1817년 태자태보(太子太保, 태자를 보좌하는 관직) 왕더루(王得祿)가 보수해 대규모 사당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창건 시기는 명나라 영력(永曆)년간인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매우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당 내로 들어서면 좌우로 잎이 무성하고 우뚝 솟아 있는 두 그루의 용수 고목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용봉고용(龍鳳古榕)이라 불립니다. 한 그루에는 긴 수염뿌리가 자라있고 다른 한그루에는 없어서 남녀의 형상이라는 말도 있는데, 마치 옆에서 관성제군을 모시는 남녀 시종 같습니다. 사당 내로 들어가면 피어오르는 향불에 마음이 편안해지는 관제전은 동구(東區)에서 매우 중요한 신앙 중심입니다.

옌핑쥔왕츠(延平郡王祠, 연평군왕사) 뒤쪽에 위치한 임수부인 사당은 1736년 건립되어 임수부인 천징구(陳靖姑)를 모시고 있습니다. 천징구는 어릴적 범상치 않게 똑똑하고 영적인 능력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후에 푸젠(福建) 일대에 큰 가뭄이 들었는데, 천징구가 임신한 몸을 이끌고 제단을 차리고 법술을 부려 기우제를 올렸습니다. 그 결과 성공적으로 비는 내렸지만 태아가 충격으로 유산되며 천징구도 사망했습니다. 임종 전에 맹세하기를 ‘죽은 뒤에 분만을 돕는 신이 될 것입니다. 특히 난산하는 부녀들을 도울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임수부인은 지금까지 계속 타이난의 신생아를 보호하고 산모들의 평안을 보우해오고 있습니다. 이곳은 대만에서 가장 오래된 순산 및 육영을 기원하는 사당이며, 타이난 부성의 자상한 산파 할머니 같은 곳입니다.

카이룽궁은 대만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칠성낭랑(七星娘娘)에게 제를 지내는 사당입니다. 여성의 자애로운 형상으로 어린이를 보우하는 신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또한 칠선녀 형상이 좋은 인연을 유지하고 좋은 애정운을 가져다 준다는 말도 있습니다. 카이룽궁은 16세 성년식으로 전국에 이름이 알려져 있습니다. 칠석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와 이곳의 매우 특색 있는 성년식에 참석합니다. 지금은 해외에까지 알려져 최근에는 많은 일본인들도 이곳에 와 성년식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이는 칠석에 열리는 타이난의 중요 행사라 할 수 있습니다.

‘대만의 첫번째 사당’이라는 존칭을 가진 서라전은 우탸오항(五條港) 구역에서 매우 중요한 사당입니다. 청나라 강희(康熙)년간(1718년) 궈(郭)씨 성을 가진 사람이 건립해 광택존왕(廣澤尊王)을 모셨습니다. 속칭 성왕궁먀오(聖王公廟)라고도 하며 유구한 역사를 거치는 동안 참배객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사당 안에는 진귀한 편액이 많이 있는데 함풍황제(咸豐皇帝)의 ‘은우전대(恩祐全台)’, 광서황제(光緒皇帝) 및 장징궈(蔣經國) 총통이 각각 선사한 ‘보안천하(保安天下)’가 있으며 이들 모두 진귀한 보물입니다.
서라전은 백년 고례이자 3년에 1번씩 개최되는 안핑 태왕(太王, 광택존왕) 맞이와 언마(恩媽, 묘응선비妙應仙妃) 주자(駐駕, 신이 행차를 잠시 멈추고 쉼) 민속 의식을 지금까지도 유지해오고 있습니다. 가마꾼들이 신가마(神轎)를 들고 린모냥(林默娘) 공원 근처의 안핑 항구 항로에서 바닷물로 세번 전진, 세번 후퇴를 하며 바다를 건너 대만에 오는 눈부신 신의 위력을 표현합니다.

공자묘 일대에 오시면 문화 창의적 분위기가 가득한 푸중가(府中街)를 구경하게 될 것입니다. 손님들이 북적이는 볶음라면 가게 골목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사당 향불 냄새를 맡으실 수 있는데 이 곳이 바로 ‘광택존왕(廣澤尊王)’을 모신 융화궁 입니다. 원래는 천융화 총독의 제사를 모셨다가 천융화 장군이 돌아가신 뒤 대만 문화 교육에 대한 공헌을 기리기 위해 사당 이름을 융화궁으로 변경했습니다. 사당 내에는 제사와 관련된 많은 고문물과 아름다운 벽화를 소장하고 있고 광택존왕이 하늘로 올라가 신이 되었을 때의 모습을 생동감있게 묘사해 놓았으며 이 전기적인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융화궁과 푸중가의 지역사회 개발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사당 입구에서 많은 제전 행사를 개최하며 안내 가이드 활동 또는 도시 리얼리티 게임 역시 이 곳을 모임의 장소로 삼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인솔해 공자묘 주변에서 수수께끼를 풀거나 또는 묘 앞 작은 골목에서 반대방향으로 좁은 입구 지나가기 등 모두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입니다.

궁위안로(公園路) 탕더장(湯德章) 기념공원 옆에 흰색의 우아한 예배당이 하나 있는데, 이는 영국 장로 교회 선교사 마야거(James Laidlaw Maxwell) 의사가 1865년에 설립한 것입니다. 이국적 정취를 짙게 풍기며 타이난에 우뚝 서있는 이 교회는 몇백년에 걸쳐 현지와 깊게 연관되어 있으며 지금까지도 마야거 의사를 기념하는 타이핑징 마야거 기념교회로 남아 있습니다. 주말이 되면 교회 내의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장엄하게 울려 퍼지며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이 곳에 와 예배를 보고 있어 온화하고 신성한 분위기로 뒤덮입니다. 교회 뒤편의 역사 자료관에는 많은 교회의 고문물과 오래된 사진들을 보존하고 있어 타이난 부성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북극 현천상제(玄天上帝)를 모시고 있는 북극전은 타이난에서 지대가 비교적 높은 곳인 주링(鷲嶺) 위에 위치해 있습니다. 북방 현무(玄武)는 검정에 속하기 때문에 다른 사당과는 다르게 검정색을 주 색깔로 한 것이 북극전의 큰 특색 중 하나입니다. 사당 내에는 타이난시에서 가장 오래된 편액이 있는데, 이는 1669년 명나라 영정왕 주수구이가 바친 ‘위현혁혁(威顯赫奕)’ 편액입니다. 사당 내의 오래된 종은 청나라 도광(道光)17년(1837년) 타이난 부성의 유지인 우상신(吳尚新. 우위안(吳園) 정원 설립자)가 중국 대륙 구쑤(姑蘇)로 가 주문 제작하여 사당에 선물한 것입니다. 이처럼 역사가 유구한 북극전 내부에는 곳곳에 보물들이 있습니다. 사당 옆 작은 골목은 옛날 지도에서는 나막신 골목이라 불렸습니다. 과거 골목 안에는 나막신을 제작하는 상점이 많이 모여있었는데, 지금은 비록 당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옛날 타이난 주요 거리의 번화했던 모습을 느껴볼 수 있습니다.

일명 제비 뽑기 골목이라 불리는 신메이제(新美街)에는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 하나 있는데, 바로 속칭 관제 항구 사당이라 불리는 카이지우먀오(개기무묘)입니다. 과거 선박이 시내로 진입할 수 있었을 당시 카이지우먀오는 하천 항구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비교적 특별한 점은 사당 문에 박은 못으로 수문신을 대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1858년부터 지금까지 걸려있는 오래된 종이 하나 있으며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편액도 있습니다. 가경(嘉慶)제 때의 행대도(行大道)와 광서(光緒)제 때의 입인극(立人極) 모두 꼭 둘러봐야 할 것들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당 내에 호랑이신 형상인 후예(虎爺)를 제사상 밑에 모셔놓는데, 이 곳은 벽의 작은 신감(神龕, 신상이나 위패를 모셔두는 장)에 모셔놓았습니다. 이는 사당 부지가 작아 공간 활용을 위해 조정한 것이라 합니다. 

삼백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전대수학(全台首學. 전국 최고의 학교)’ 공자묘는 타이난이 문화의 고도(古都)라 불리는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난먼로(南門路)에 길게 이어진 붉은 벽은 나뭇가지 끝을 통과하는 햇빛 아래 성스러움을 보여주며 타이난 고도의 독특한 정취 또한 보여줍니다. 유구한 역사의 공자묘를 중심으로 옛 거리들을 연결하고 근처 주요 고적인 다난먼(大南門), 푸중가(府中街), 연평군왕사(延平郡王祠) 등을 연결해 거리를 누비며 고도의 분위기를 맘껏 느낄 수 있는 문화 단지로 조성했습니다.

카이산로(開山路)와 푸첸로(府前路) 교차로에는 말 위에 올라탄 연평군왕 석상이 위풍당당하게 전방을 바라보며 마치 타이난의 수호신처럼 모든 이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옌핑쥔왕츠는 붉은색을 주제로 하고 일본식 정취를 융합한 푸저우(福州)식 건축물입니다. 사당 안 네개의 문 앞에는 8명의 수문신이 그려져 있는데, 자세히 보면 푸른 눈에 피부가 흰 외국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정성공(鄭成功)이 네덜란드인들을 몰아낸 것을 기리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서양인이 명나라 관복을 입고 계속 사당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모습은 흥미로운 광경이 되었습니다. 옆에 있는 정성공 문물관은 진귀한 고문물과 역사 자료를 많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카이산 신사(開山神社) 시기의 일본식 가마 등이 있습니다. 1662년 정성공을 기념하던 작은 사당에서 시작해 카이산 왕먀오(開山王廟) 사당이 되었고, 일본 통치 시기의 카이산 신사가 지금에 이르러 현재의 옌핑쥔왕츠가 되었습니다. 각종 역사 기재와 문물 맥락으로부터 정성공이 대만 발전에 공헌한 숭고한 지위를 알 수 있습니다.